주류경제학에서 경제적 '이윤' 개념.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이해

주류경제학에는 독특한 용어법이 있는데, 바로 '이윤(profit)'이란 개념이다. 기업이 벌어들이는 이득을 보통 이윤이라고 부르는데 뭐가 특별할까 싶겠지만, 경제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완전균형상태에서 이윤이 0으로 수렴한다"는 말을 교과서에서 읽으면 (내가 1학년 경제원론시간에 그랬듯이) 한번쯤은 멘붕하거나 잠시나마 의아해할 것이다. 아니, 그럼 기업은 뭐 먹고 사는거임?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류경제학의 독특한 경제주체 설정방식과 '기회비용'이란 개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우선 경제주체 설정방식을 맑스경제학과 비교를 통해 이해해보자. <자본론>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의 주체가 두개의 '계급', 즉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양분되는데 이를 구분하는 것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와 착취관계이다. 주류경제학에서도 '가계'와 '기업'이라는, 언뜻보면 유사한 구분이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판이하게 다른다. 가계는 상품에 대한 소비자(수요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요소'를 공급하는 공급자이기도 한데, 여기서 생산요소는 노동 뿐만 아니라 자본(생산수단)까지도 포함한다.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생산에서의 적대적 관계는 사라지고, 노동도 일부 소유하고 자본도 일부 소유하는 '가계'라는 경제적 주체 개념 속에서 단지 보유량의 상대적 비율만 다른 수많은 개별주체들이 존재하는 세계로 포장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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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자본가가 '가계'에 포함되어 있다고? 그렇다면 '기업'은 뭔가? 기업은 일종의 비인격적(impersonal) 주체인데, 수많은 가계들로 부터 그들이 소유한 노동과 자본을 '빌려와서' 상품을 생산하는 '생산단위'를 기업이라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노동자와 월급사장(CEO같은)과 주주들이 함께 모여서 수익을 내고 보수를 나눠갖는 주식회사(법인기업)를 생각하면 된다. 따라서 경제학에서 '가계'와 '기업'은 어떠한 생산관계나 이를 반영하는 소유관계 의해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이를 은폐하고) 각각의 시장에서 맺는 교환관계(수요자/공급자)를 기준으로 나눈 주체분류인 것이다.

2) 이제 주류경제학에서 기업이 생산한 생산물의 가치를 어떻게 분배하는지를 살펴보자. 기업이 상품을 팔면 판매수입이 들어오는데, 이는 (상품생산의 기회비용 + 경제적 이윤)으로 나뉜다. 기회비용이란건 어떤 경제행위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다른 선택지에서 오는 이득을 뜻하는데, 노동을 예로들면 '여가를 즐길 수 있었는데도 그걸 포기하고 일하러 왔으니' 그만큼의 임금을 줘야 된다는 셈이다. 자본에 대한 보수도 비슷하게 정의되는데, '다른 곳에 투자해서도 이 정도는 수익을 낼 수 있는데도 이 쪽에 투자를 했으니' 적어도 그 만큼의 수익을 보장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에 투자를 해 생산을 하지 않았어도 은행에 돈을 넣어 놓았으면 이자가 나오는 것이므로, 그만큼의 보상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기회비용'이 되어서, 기업의 입장에서는 '자본을 빌려준 가계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적 이윤은 뭔가? 총 판매수입에서 앞에서 정의한 기회비용들을 뺀 나머지, 맑스식으로 말하면 특별잉여가치 혹은 '초과이윤'이라는 불리는 것이 경제적 이윤이다. 시장이 완전균형이라면, 어느 기업도 특별히 이득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가계가 빌려준 노동과 자본에 대한 각각의 보수(기회비용)을 제공하고 나면 기업에게 남는건 없다는 논리다.

3) 보통, 기업의 투자에 대한 수익을 이윤으로 생각하는데, 이러한 상식은 기업자체를 자본을 소유한 주체로 사고하는 방식에서 유래하는 것이므로 주류경제학의 주체설정방식과는 다르다. 만약 이러한 상식에 근거해 이윤을 계산하면, 앞에서 말한 '자본대여에 대한 보수(기회비용)'과 '경제적 이윤'을 모두 포함하게 된다. 주류경제학의 논리에서도 기업이 자본을 빌려서 생산하지 않고 온전히 기업이 소유한 자기자본으로 생산을 한다고 가정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기업이 그 자본을 생산에 투하하지 않고 다른 자산을 사거나 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선택한 것이므로, 그렇게 포기한 대가만큼은 (설사 그것을 자기가 다시 소유한다 해도) '기회비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자본투자의 기회비용을 부분을 '정상이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윤이긴 하지만 '정상적인', 즉 당연히 얻을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사실상 경제적인 의미에서는 이윤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4) 결과적으로, 경제원론에서 '완전경쟁 하에서 이윤이 0으로 수렴한다'는 말은, 정상이윤(자본투자의 기회비용)이 0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윤(즉, 초과이윤)이 0이 된다는 말이다. <자본론>에서도 특별잉여가치 혹은 초과이윤은 한시적으로만 발생하고 장기적으로는 0에 수렴한다고 적혀 있으니, '균형'에 대한 인식은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자본에 대해 당연히 지불되어야 하는 그 비용, 정상적 '이윤'은 대체 어디서 나오냐는 것이다. 맑스의 잉여가치론은 여기서 부터 시작하고, 그 결론은 생산수단의 소유에 근거한 임금노동의 착취였다. 주류경제학에서는 그 용어를 따르자면 '이윤'은 0이되고, 결국 그들 입장에서는 자본투자에 대한 기회비용이라 할 수 있는 '이자'나 '배당' 등의 원천을 밝히는 문제로 소급되는데, 돌고 돌고 돌면 최종적으로 '노동'과 마찬가지로 '자본'도 스스로 가치를 생산하는 능력이 있다는 논의로 수렴된다.

결과적으로, 분배와 관련된 모든 논의도 '가치론'으로 수렴된다. 달리 말하면, 가치론을 갖지 못한 어떠한 경제학도 분배 관련 이슈에서 최종적인 버팀목을 갖지 못하게 된다. 맑스경제학이 '근본도 없이' 공중분해 되지 않고 독자적 영역을 이론적으로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가치론'이라는 굳건한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한 맑스경제학자의 통찰은 이런게 아닐까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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